글 쓰는 20대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서울대를 갔을 텐데
굳이 굳이 무언가에 '과몰입'하는 20대의 속사정
"너 요즘도 그거에 빠져 있어?", "그거 할 시간에 자기계발이나 하지?"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 무언가에 깊게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 3시간 대기는 기본인 팝업스토어 오픈런, 수강신청급 광클 티켓팅, 밤새 아티스트 하나만 파고드는 정주행까지. 그래서 붙은 이름이 '과몰입러'다.
'과몰입'이라고 하면 그냥 웃고 넘길 딴짓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 안에는 팍팍한 현생 속에서 나만의 통제권과 정체성을 지키려는 20대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이 숨어 있다.
솔직히 이건 남 얘기가 아니다. 나도 과제 마감 세 시간 전에 갑자기 플레이리스트를 정리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싶으면서도, 묘하게 그 순간이 하루 중 제일 숨통 트이는 시간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요즘 가장 화끈하게 뭔가에 빠져 있는 친구 세 명을 붙잡고 물어봤다. 취향에 진심인 20대들, 속마음이 궁금했다.
01. 팍팍한 현생, '확실한 내 세계'가 필요하니까
시험 기간이나 과제 마감 직전에 이상하게 평소엔 관심도 없던 분야가 갑자기 흥미로워진 적, 다들 한 번쯤 있을 거다. 학점도, 알바도, 취업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상에서, 과몰입 대상은 그나마 내 손으로 통제할 수 있는 확실한 도피처가 되어준다.
정제희 (덕성여자대학교 정보통계학과 25학번, 향수 과몰입러)
향수 공방에서 직접 조향을 하는 사진
제희는 학점이나 인턴 서류 결과가 아무리 잠을 줄여가며 노력해도 뜻대로 안 될 때가 많다고 했다. 거기서 오는 무력감이 제일 크다고. 반면 향수 브랜드마다의 조향 히스토리를 파고들고, 노트 하나하나를 뜯어보면서 나한테 맞는 향을 찾아갈 때는 딱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만큼 감각이 채워진다.
"제 삶의 통제권을 다시 찾아오는 느낌이죠.“
이렇게 뭔가에 빠져 있으면 오히려 일상이 더 흔들리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정반대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 시간이 없으면 현생을 버틸 힘 자체가 없다는 거다. 남들 눈엔 딴짓처럼 보여도, 주말마다 향수 편집숍을 돌면서 시향지에 향을 하나씩 묻히고 비교하는 그 시간이 제희에겐 가장 확실한 충전소다.
02. 가성비는 모르겠고, '진짜 나'를 채우는 시간
"그게 돈이 돼? 스펙이 돼?" 누군가는 혀를 찰지도 모른다. 근데 24시간 내내 효율만 따지다 보면 마음이 먼저 말라버린다. 남들 눈엔 '쓸데없는 짓'이어도, 좋아하는 걸 위해 시간과 돈을 쓰는 순간만큼은 '남들의 기준'이 아니라 '내 기준'으로 하루를 채우는 감각을 준다.
정유담 (건국대학교 수의예과 26학번, 초보 러너 & 마라톤 과몰입러)
러닝을 위해 구매한 운동화
빽빽한 전공 서적 사이에서 헤매다보면 머리가 마비되는 느낌이 든다고 유담은 말했다. 하루 종일 남들이 세운 기준에 나를 맞추는 기분도 든다고. 그런데 밤에 러닝화 끈을 조여 매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게 달리다 보면 잡생각이 다 날아가면서, 그제야 오늘 하루의 주도권이 다시 내 손에 들어온다.
효율만 보면 그 시간에 공부나 스펙을 더 쌓는 게 맞다는 것, 유담도 안다. 그래도 마라톤 완주라는 자기만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시간 자체가 유담에겐 이미 보상이다.
"가성비로는 설명할 수 없는 확실한 성취감이 있거든요."
03. "이거 좋아하세요?" 한 마디가 만드는 강력한 팬덤
20대의 과몰입은 혼자 좋아하고 끝나지 않는다. SNS에 과정을 기록하고 공유하면서, 나처럼 '그것'에 미쳐 있는 사람을 찾아낸다. 어색하고 겉치레뿐인 관계보다 "이거 좋아하세요?" 한마디로 시작되는 대화가 훨씬 깊은 유대감을 만든다.
신지혜 (공주대학교 의료정보학과 25학번, 캐릭터 과몰입러)
좋아하는 캐릭터를 수집한 모습
과몰입으로 얻은 가장 큰 변화가 뭐냐고 묻자 지혜는 잠깐 고민하더니 진짜 마음이 통하는 '취향 동료'를 만난 것이라고 답했다. 학교 친구들한테는 길게 설명해야 이해받던 취향을, "이거 좋아하세요?" 한마디로 단번에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그 쾌감이 크다고 했다.
내가 빠진 브랜드나 문화가 다른 사람들한테 알려질 때는 마치 마케터가 된 것처럼 자발적으로 영업하고 다니게 된다며 지혜는 웃었다. 좋아하는 걸 넘어서 그 브랜드가 잘되길 진심으로 응원하게 되더라고. 요즘도 친구들끼리 오래오래 이 덕질 같이 가자는 얘기를 종종 한다고.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 눈에 띄는 게 있었다. 향수든, 러닝이든, 캐릭터든 다들 ‘무엇에’ 빠졌는지는 다 달랐지만, ‘왜’ 빠졌는지는 거의 똑같았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시기에, 적어도 이것 하나는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 결국 다들 같은 걸 찾고 있었다.
당신의 과몰입 구역은 어디인가
누군가는 "그거 할 시간에 자기계발이나 하지"라며 혀를 찰지도 모른다. 그런데 남들이 정해둔 기준 맞추느라 지친 하루에, 좋아하는 것에 흠뻑 빠져보는 것만큼 확실한 충전은 없다.
결국 20대의 과몰입은 그냥 딴짓이 아니다. 남들 시선에 쫓기는 대신 내가 고른 취향으로 일상의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우리 나름의 솔직한 생존법이다. 학점도 취업도 미래도 내 뜻대로 안 되는 요즘, 100% 내 마음대로 되는 세계 하나쯤은 갖고 있는 것. 어쩌면 그게 지금 20대가 찾은 답일지도 모른다.
오늘 밤 당신을 숨 쉬게 만드는 과몰입 구역은 어디인가.
#과몰입#통제권#대학생#취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