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20대

정답 없는 공부를 해보기로 했다

내 생각을 외치지 못하는 '한국형' 대학생들을 위해
나는 지극히 한국적인 일반고 출신의 국제대생이다. 해외고, 국제고, 외고 등을 졸업한 동기들 사이에서 일반고 출신으로 공부하는 것은 꽤나 주눅 드는 일이다. 영어 실력 차이로 인한 것도 물론 있지만, 그보다 더욱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따로 있었다.

수업 중 교수님의 질문에 적극적으로 답하는 학생들은 주로 외국인이나 해외고 출신 학생들이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만 감탄하곤 했다. 나도 손을 들 수 있다는 건 옵션에도 없었다. 그렇게 학기 중반이 지나가던 차, 한 외국인 학생과 대화하던 중 "여기 학생들이 너무 소극적이어서 놀랐다"는 말을 들었다. 고등학교에선 볼 수 없었던 학생들의 적극성에 놀라고 있던 나로서는 정반대의 시선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다이어리에 적었다. 

"난 결국 한국 주입식 교육에 갇힌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그날에는 모든 원인을 ‘한국 주입식 교육’이라는 일곱 글자 안에 넣으면 설명이 되는 줄 알았다.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나에게 처방을 내리기에 앞서 다양한 분야에 속한 3명의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는지, 또는 벗어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아는 답도 말하지 못하게 됐어요”

고려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과 26학번 강수연

 


Q. 자신의 답에 확신이 없었던 경험이 있나요?

많다. 수업뿐 아니라 동아리나 학과 활동처럼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회의 중 누군가 “이런 장소가 필요한데, 아는 곳이 있으면 말해주세요”라고 하면 떠오르는 장소가 있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한다. ‘정말 이 사람이 원하는 장소가 맞을까?’, ‘내가 맥락을 잘못 이해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고민이 길어지다 결국 알고 있는 장소를 말하지 못하고 넘어가곤 한다.




Q. 그런 태도의 배경이 있을까요?


원래 내가 직접 경험한 감정과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을 좋아해 문예창작을 시작했다. 하지만 입시를 준비하면서 내가  쓰고 싶은 글과 좋은 평가를 받는 글 사이에 간극을 느꼈다.


입시 학원에서는 가난이나 비극, 아픔처럼 어떤  결핍이 드러나는 시를 쓰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제가 겪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서 써야 한다는 게 싫었다.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쓰고 싶은지보다 심사자가 무엇을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할지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 


가장 허탈했던 순간은 그렇게 입시를 위해 만들어낸 시가 실제로 상을 받았을 때였다. 내가 정말 아끼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 입시를 위해 쥐어짜낸 시가 상을 받으니까 오히려 인정받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결국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보다 무엇이 ‘적절한 답’인지 먼저 고민했던 것이 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남았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아무도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부터 확인한다.



Q.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도 ‘잘못된 답’을 내놓을까 봐 불안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멍청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두려운 것 같다. 내가 잘못된 말을 하면 그 순간 ‘쟤는 이것도 모르는구나’라고 생각할 것 같다. 그래서 확실하지 않으면 차라리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또, 괜히 나섰다가 남들이 나댄다고 생각할 것 같다는 걱정도 있다. 수업 시간에 답을 말했다가 교수님에게 피드백을 듣는 학생을 보면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발표 안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한다. 물론 그 학생은 더 배우는 게 많아지니 좋겠다는 생각도 내심 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그가 되고 싶지는 않다.



결국 우리가 침묵하는 이유는 단순히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다만 그것을 꺼내기 전에 ‘이게 좋은 답일까’를 먼저 생각하게 됐을 뿐이다.

우리는 내 생각보다 평가받을 만한 생각을 먼저 찾는 데 익숙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태도가 바뀌니 다시 정답을 찾게 됐어요”

연세대학교 융합인문사회과학부 26학번 이승민



Q. 어릴 적 캐나다 유학 경험이 있다고 하셨는데, 캐나다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수업에 어떻게 참여했나요?

나다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발표와 토론, 모둠 활동이 일상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과정 자체가 수업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말을 잘했던 것은 아니지만 계속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다 보니 어느 순간 그것이 자연스러워졌다.


@titanconstruction

Q. 한국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신의 학습 태도에도 변화가 있었나요?

시간이 지나며 나도 평가자의 시선을 먼저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의견을 이야기하는 데 거리낌이 생겼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타인의 의견과 부딪치며 사고를 확장하는 경험 자체가 줄어들면서 결국 힘들게 대학에 들어와 놓고 무의미한 공부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감이 드는 순간도 많다.


아무도 발표하지 않는 수업을 듣고 있으면 수업 내용은 배우더라도 내 사고력이 커지고 있다는 느낌은 잘 안 든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교수님과 의견을 나누는 학생들과 비교하면 같은 수업을 듣고도 내가 얻어가는 게 훨씬 적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손해보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Q. 그런 변화가 가장 실감되는 순간은 언제였나요?

한 교양 수업에서 영화에 관한 에세이 과제를 받았을 때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보다는 교수님이 원하는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먼저 들어 GPT나 인터넷에 '분석할 거리가 많은 영화'를 검색했던 경험이 있다. ‘A+ 족보’를 구해 이전 수강생들의 답안을 참고하기도 했다.


나만의 감상을 쓰는 에세이 과제에서 마저 모범 답안을 모방해가며 정답을 찾으려고 하고 있었다는 게 씁쓸하지만 점수를 잘 받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높은 성적을 받기 위해 효율적으로 공부하는 법은 점점 익숙해지고 있지만, 정작 수업에서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배웠는지는 점점 희미해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또 다른 의문에 답을 주었다. 나는 지금껏 적극적으로 발표하는 학생들을 '적극적인 사람', 나 자신을 '소극적인 사람'으로 이분법적으로 분리한 채 나는 그들이 될 수 없을 거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전에는 자연스럽게 의견을 말하던 사람도, 다른 방식의 공부를 반복하면서 다시 교수의 의도와 모범 답안을 먼저 찾게 됐다.

결국 중요한 건 '어떤 사람인가'가 아닌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는가'였던 것이다. 


“이제는 남들의 시선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예술을 하고 싶어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회화과 26학번 정현지



Q. 남들의 정답을 따라가야 했던 경험이 있나요?

미대 입시를 준비하며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과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그려야 하는 그림’ 사이에서 오랫동안 고민했다. 내가 정말 그리고 싶었던 것은 전통 그림이었다. 그러나 소위 '좋은 대학'이라 불리는 수도권 학교들에는 전통 그림을 가르치는 과가 없었기에 갈등했다. 


사람들은 학벌을 중요시하니까, 일단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해 내가 하고싶지 않았던 분야의 그림을 획일적으로 그려야 했다.



Q. 그러한 정답을 벗어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현역 때까지만 해도 그 갈등 속에서 ‘좋은 대학’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보다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가 더 중요했고, 남들에게 보여지는 대학의 간판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재수를 시작하면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예술이 무엇인지를 오래 고민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예술을 배우기 위해 지방에 있는 대학교에 지원하기로 했다. 입시 학원에서는 학원 홍보를 위해 더 높은 입결의 대학에 지원하기를 권했으나 휘둘리지 않았다.


결국 재수는 남들이 정해놓은 ‘좋은 선택’을 그대로 따르는 대신, 내가 원하는 것을 기준으로 선택해보는 시간이었다. 좋은 대학이라는 익숙한 답에서 벗어나자 비로소 ‘나는 어떤 예술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Q대학에 온 뒤에는 온전히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나요?


원하는 대학에 입학한다고 해서 곧바로 입시의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만 합격하면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역량을 다 갖추게 되는 줄 알았으나, 막상 와서 보니 그동안 배웠던 건 창작이라기보다 남들이 시키는 걸 프린터기처럼 똑같이 출력하는 방법에 가까웠다.


한번은 교수님이 내 그림을 보고 ‘너무 잘 보이려고 애쓰는 그림을 그린다’고 하셨다. 다른 사람이 좋아할 만한 그림을 그리려고 하지 말고, 내가 정말 표현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라며 자유로워지라고도 하셨다.


그 뒤로는 남들이 봤을 때 좋아하는 그림보다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려고 한다.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도 조금씩 내려놓으며 '순수한 예술'을 찾고 있다.


입시에서 벗어난 뒤 가장 먼저 배워야 했던 것은 새로운 기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랫동안 익숙했던 기준을 내려놓고, 자신의 취향과 판단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누군가 정해준 답을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에서 벗어나, 이제야 자신의 답을 그리는 연습을 시작한 듯하여 만족스럽다.




이 이야기는 앞선 두 사람의 이야기와 조금 다른 곳에서 끝났다. 이제는 ‘어떻게 그려야 잘 그렸다는 말을 들을까’ 대신 ‘나는 무엇을 그리고 싶은가’를 묻기 시작했다. 입시에서 배운 기술을 모두 버린 것도, 다른 사람의 평가를 완전히 무시하게 된 것도 아니었다. 단지 판단의 순서를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남의 기준을 확인하기 전에 자신의 취향을 먼저 들여다봤다.

그 모습을 보며 한 가지 가능성이 보였다. 정답을 찾는 태도가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습관이라면, 반대로 내 생각을 먼저 꺼내는 태도 역시 다시 연습할 수 있는 습관 아닐까.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처음 다이어리에 적었던 문장을 다시 봤다.


“난 결국 한국 주입식 교육에 갇힌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이제는 모든 화살을 단순히 주입식 교육에게 돌리기엔 무리가 있음을 안다.

우리는 창의력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수연 씨에게는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고, 현지 씨에게는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었다. 나 역시 수업을 들으며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부족했던 건 믿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정답이 없는 순간에도 내 답을 불신하고 습관처럼 답지부터 찾아 왔다. 그리고 그 문제가 습관에 불과하다면, 꼭 그대로 살아갈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나부터 작은 순서를 바꿔보기로 했다. 교수님의 질문 앞에서 완벽한 문장을 만들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한번 말해보기. 과제를 받자마자 검색하기보다 내가 흥미로운 것을 먼저 적어보기. 누군가가 좋다고 하는 선택 앞에서 ‘그런데 나는 뭘 좋아하지?’라고 한번 묻기.


정답을 찾는 데 익숙해진 우리가 하루아침에 정답 없는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어쩌면 한국의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지금껏 배운 것을 모두 버리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정답을 찾기 전에 내 생각을 먼저 믿어보는 연습을 시작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음번 정답 없는 질문 앞에서는, 우리 조금 덜 망설여보는 건 어떨까.



#대학생#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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