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모두가 나를 잊어버린다면?
최근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를 봤다.

나름 나쁘지 않았다.
영화의 전반적인 이야기는 스파이더맨이 모든 사람들에게 잊혀진 뒤 시작된다.
영화를 보면서 파워 N인 나는 자연스럽게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 정말 모든 사람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나는 뭘 하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범죄였다.
아무도 나를 모른다면 잡힐 일도 없지 않을까?
열심히 범죄 현장까지 상상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니, 굳이 범죄까지 갈 필요가 있나?
그래서 방향을 바꿨다.
‘모든 사람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이라는 상황을 오늘 하루에 적용해보기로 했다.
말 그대로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도 나를 모른다고 생각하고 살아보기.
Ch1.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것들
아침부터 달랐다.
평소의 나라면 한 달 뒤 개강을 앞두고 ‘개강 여신’으로 등장하기 위해 건강하지만 맛없는 점심을 먹고
건강한 식단을 한 나의 일상을 공유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달랐다.
다이어트? 일단 뒤로 미뤘다.
아침부터 먹고 싶은 것을 푸짐하게 먹었고 기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점심이 됐다.
평소 같으면 인스타그램에서 본 ‘3학년 여름방학에 꼭 해야 하는 것’ 같은 게시물을 떠올렸을 것이다.
1. 토플 공부하기.
2. 자격증 따기.
3. 스펙 쌓기.
그래서 도서관에 가서 토플을 공부하다가 자격증 공부를 하고, 정신을 차려보면 밤이 되어 집에 돌아가는 것이 평소의 여름방학이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토플은 따야지.’
‘자격증도 있어야지.’
‘남들은 다 하는데 나도 해야지.’
이런 생각들을 잠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냥 놀았다.
오늘의 나는 오프숄더 원피스를 입었다
일단 옷부터 달랐다.
옷장에 분명히 있지만 평소라면 절대 입지 못하는 오프숄더 원피스를 꺼냈다.
평소라면 이런 생각부터 했을 것이다.
‘너무 튀나?’
‘사람들이 쳐다보면 어떡하지?’
‘나한테 안 어울리면 어떡하지?’
그런데 오늘은 아무도 나를 모른다.
그러니까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시선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을 하니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 있었다.
놀이터.
마지막으로 그네를 탄 게 언제였더라.
아마 7살 이후로는 제대로 타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탔다.
그것도 엄청 탔다.
문제는 뒤에서 어린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평소의 나라면 “아이가 기다리니까 내가 양보해야지” 하고 내려왔을 텐데,
오늘의 나는
조금 더 탔다.
물론 결국 내려줬다.
하지만 꽤 오랜만에 그네를 타고 있으니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나는 왜 그동안 안 탔지?’
어쩌면 그네를 탈 나이가 지나서가 아니라,
그네를 타는 나를 누가 볼까 봐 안 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혼자 케이크 세 개를 주문했다
그다음에는 카페에 갔다.
평소 같으면 아메리카노 하나를 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케이크가 먹고 싶어도 고민했을 것이다.
‘혼자 케이크를 세개나 시키면 이상하게 생각하려나?’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아무도 나를 모른다.
그래서 케이크를 세 개 주문했다.
옆자리 앉은 사람이 잠깐 나를 쳐다보셨던 것 같기도 하지만, 상관없었다.
먹고 싶으니까 시켰다.
세 개를 한꺼번에 놓고 보니 조금 웃겼다.
하지만 행복했다.
평소라면 ‘혼자서 세 개나 먹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하지 못했을 일을, 오늘은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면서 살고 있었구나.
그리고 무작정 행궁동으로 갔다
이쯤 되니 조금 더 대담해졌다.
그래서 그냥 수원 행궁동으로 갔다.
원래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인스타에서 그곳의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들로 소개하여
나에게 행궁동은
‘남자친구가 생기면 가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남자친구가 필요 없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날이니까.
혼자 사진도 찍었다.
평소라면 사진을 찍고 싶어도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게 조금 민망해서 포기했을 텐데, 오늘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저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실 수 있나요?”
생각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진을 찍어주셨고,
나는 “감사합니다!” 하고 웃었다.
끝이었다.
그동안 혼자서 머릿속으로 만들어냈던 수많은 걱정들은 실제로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았다.
Ch2.
정말 아무도 나를 모른다면
하루를 그렇게 보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나를 모르면 정말 자유롭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다.
입고 싶은 옷을 입었고,
먹고 싶은 케이크를 먹었고,
그네도 탔고,
가고 싶었던 곳에도 혼자 갔다.
토플도 자격증도 잠시 잊었다.
‘그래도 내일은 다시 내가 아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혼자 있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생각보다 꽤 좋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내가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해도 웃어주는 사람들.
결국 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잊혀지고 싶은 게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가끔은
아무도 나를 평가하지 않는 곳에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보고 싶었던 것 같다.
Ch3.
그래서 오늘의 결론
‘모두가 나를 잊어버린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
처음에는 범죄까지 생각했던 내가 하루를 보내고 내린 결론은 의외로 소박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것.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입고 싶은 것을 입고,
놀고 싶으면 놀고,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혼자라도 가보기.
그리고 다시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다만 조금 달라진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은 내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나를 조금 더 데리고 살아가기로 했다.
그러니까 혹시 요즘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이걸 해도 될까?’
‘다들 이 정도는 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다면,
오늘 하루만큼은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아무도 나를 모른다면, 나는 뭘 하고 싶지?”
그리고 그 답이 생각보다 사소한 것이라면,
그냥 해보자.
그네를 타도 되고,
케이크를 세 개 시켜도 되고,
혼자 서울에 가도 된다.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던 건
남들이 나를 잊는 방법이 아니라, 내가 나를 너무 신경 쓰고 있었다는 사실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