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20대
같은 포장지를 입은 우리, 무엇이 우리를 특별하게 만들까
결핍 있는 거? 그거 내 잘못 아닌데
결핍이라는 상처에 밴드를 붙이는 대학생들#상처에 밴드 붙였다고 내가 못난 사람은 아니잖아

상처가 생기면 우리는 가장 먼저 밴드를 찾는다.
피가 나는 곳을 가리고, 남들이 보지 못하게 숨긴다. “괜찮아?”라는 질문을 받기도 싫고, 굳이 아픈 곳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으니까. 밴드는 꽤 유용하다. 상처가 더 커지지 않도록 보호해주고, 아물 때까지 잠시 숨겨주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밴드를 붙였다고 상처가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오래 붙여둔 밴드를 떼면 피부가 하얗게 불어 있듯, 밴드만 꽁꽁 붙여둔다고 상처가 알아서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의 결핍도 그렇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무언가를 덧붙인다.
조금 더 괜찮아 보이기 위해, 조금 덜 부족해 보이기 위해.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누군지보다 나에게 붙어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진다.
그런데 잠깐. 결핍 있는 거, 내 잘못 아님.

그렇다면 우리가 붙이고 있는 밴드는 무엇일까.
그리고 하나씩 떼어냈을 때, 그 아래에는 어떤 내가 남아 있을까.
Part1. 능력이라는 결핍#지방대 열정맨 K군의 이야기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크게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주변에서 늘 “인서울은 해야 한다”는 말을 하니까
저도 인서울을 목표로 공부했어요. 남들 다 한다는 과외도 받고, 인강도 듣고, 학원도 다녔죠.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봤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제가 도달할 수 있었던 마지노선은 지방 국립대였어요.
그때는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학에 들어오고 취업을 준비하면서 ‘지방대’ 그리고 ‘문과’라는 꼬리표가 생각보다 오래 따라온다는 걸 알게 됐어요.
특히 사기업 문과 직무에 지원할 때면 수많은 스카이 출신 지원자들이 보였어요.
그들의 이력을 보고 있으면 지원 완료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끝난 기분이랄까.

그래서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활동했어요. 서포터즈도 하고, 봉사단도 하고, 앰배서더도 했어요.
처음에는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별명도 열정맨이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거 그 선배도 했다던데”, “나는 지방대니까 좀 더 해야 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하나 끝내면 뿌듯한 게 아니라 다음에 뭘 더 해야 할지가 먼저 보였어요.
그렇게 제 이력서는 점점 다채로워졌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다채로운 게 아니더라고요.
이것저것 덧붙인 얼룩덜룩한 낙서장 같았어요.
문득 “나는 뭐를 하고 싶었던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저를 찾으려고 시작했던 활동들이 어느 순간 부족한 저를 가리는 일이 되어 있었어요.
인스타그램에 #취준생 을 검색하면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처럼요. 비슷한 포트폴리오, 비슷한 활동, 비슷한 성장 과정.
열심히 살았는데 이상하게 ‘나’가 남지 않았어요. 저는 지금 제가 그냥 복제인간 같아요.

Part2. 외모라는 결핍# 아가리 다이어터 A양의 이야기

재수를 하면서 몸무게가 늘어났어요. 대학에 오고 나니 사진 한 장 찍는 것도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동기들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네컷사진을 찍곤 하는데, 그 사진 속 제 모습이 너무 못나 보이더라고요.
친구들은 다 같이 웃고 있는데 저는 사진을 확인하면서 제 얼굴이랑 몸만 보고 있었어요.
축제에 갔던 날도 기억나요. 친구들은 학교 굿즈를 자기 스타일대로 예쁘게 리폼해서 입었는데 저는 과잠만 툭 걸쳤어요.
같은 축제에 왔는데 저는 그냥 도서관에 있다가 잠깐 들린 애 갔더라고요.
그때 저에게 키빼몸 120은 그냥 숫자가 아니었어요.
그 숫자가 되면 사진 찍을 때 덜 신경 쓰이고, 옷 입을 때도 조금 덜 눈치 볼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인스타그램에서 제가 닮고 싶은 분위기의 사람들을 찾아봤어요.
다이어트 방법도 보고, 관리법도 보고. “부작용 없는 쁘띠 시술” 같은 게시물이 나오면 몰래 스크랩하는 것도 일상이었어요.
당장 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일단 저장.
처음에는 그냥 예뻐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제가 원했던 건 완벽한 외모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네컷사진 한 장 찍고도 내 모습이 신경 쓰이지 않는 것, 좋아하는 옷을 입고도 눈치 보지 않는 것.
그리고 사실 저는 아직도 옷보다 엽떡을 더 좋아해요.ㅎㅎ

Part3. 관계라는 결핍#시크도도걸 H양의 이야기

요즘 “사랑받고 자란 아이는 티가 난다”라는 말이 유행하더라고요. “가난하게 컸어?”라는 말도요.
누군가에게는 그냥 지나가는 말일 수 있는데 저는 그 말을 볼 때마다 심장이 콕콕 찔려요.
저는 두 개 다 해당하거든요. 사랑받지도 못했고, 가난하게도 컸어요.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어요. 아버지는 가정적이지 못하셨고, 어머니는 현실적으로 경제력이 없으셨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강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힘든 일이 있어도 괜찮은 척하고, 누군가에게 기대기보다 혼자 해결하는 게 익숙했어요.
그런데 사실 저는 되게 겁쟁이예요. 여리고, 겁도 많고, 정도 많아요.
그런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이 저를 안타깝게 볼 것 같아서 싫었어요.
그래서 연약하고 사랑과 다정이 고픈 저를 숨기고 시크한 척하고 다녔어요.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주는 방법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대학에 와서 누군가가 다가와도 다정한 말 한마디를 쉽게 믿지 못했어요.
분명 좋으면서도 “왜 나한테 잘해주지?”부터 생각했어요. 그래서 괜히 더 강한 척하고 밀어냈어요.

사실 저는 알콩달콩한 연애가 너무 하고 싶어요. 제가 받아보지 못했던 자상한 사랑을 받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안겨 펑펑 울기도 하고, 별것 아닌 일에 깔깔 웃기도 하고 싶어요.
사실 나, 이런 사람이야
중요한 건 포장지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이야기였다
요즘 인터넷을 켜면 이런 문장이 자주 보인다.
“AI에게 대체되지 않는 인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대체될 수 없는 인재를 찾습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대체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엄청난 부자인 사람? 남들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 모두가 부러워하는 외모와 스펙을 가진 사람?
아니다.
나보다 잘 사는 사람은 수백만 명이고, 나보다 멋진 사람은 수천만 명이다.
결국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없다.

우리가 대체되지 않는 이유는 남들보다 더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 누구도 대신 가질 수 없는 나만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꽤 열심히 나를 포장해왔다.
더 좋은 학교, 더 많은 경험, 더 완벽한 모습, 더 사랑받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덧붙였다.
부족해 보이지 않기 위해 붙인 스펙, 자신감을 얻기 위해 시작한 관리,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만들어낸 단단한 모습까지.
그렇게 하나씩 붙이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누구인지보다 나에게 붙어 있는 것들이 더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가 선물을 받을 때 설레는 이유는 화려한 포장지 때문이 아니다.
결국 궁금한 것은 포장지를 열었을 때 무엇이 들어 있는지다.
조금 구겨진 포장지라도 그 안에 내가 아끼는 것이 담겨 있다면 충분히 특별하다.
우리의 결핍도 마찬가지다.
지방대였던 시간도, 외모 때문에 작아졌던 순간도,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도 모두 지금의 나를 만든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제 너무 완벽한 포장지를 만들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우리, 그만 같은 포장지에서 나오자.
그리고 한번 말해보자.
“사실 나, 이런 사람이야.”


포장 끝.
이제 내용물 좀 보자.
#결핍#취준#외모#사랑#솔직함